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배넉번 전투 (문단 편집) === 승리의 원인 === 스코틀랜드는 모든 면에서 잉글랜드한테 열세였다. 스코틀랜드 보병대는 잉글랜드 보병과 정면으로 맞붙는 게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문제는 수적으로만 이미 '''3배''' 열세. 궁병과 기병도 질적으로나 수적으로나 잉글랜드와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궁병대는 2일차 전투에서 기습적으로 선공을 개시했으나 잉글랜드 장궁병대가 반격을 개시하자 곧 패퇴하고 말았고, 스코틀랜드의 기병대는 아예 대적조차 불가능하여 처음에는 전장에 내보내지도 않았다.] 비교할 가치도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열세인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군을 정면에서 격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각 부대 사이의 유기적인 협동공세'''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군 보병의 밀집 장창벽(쉴트론)은 잉글랜드 중기병대도 격퇴할 만큼 무적의 방어력을 자랑했고, 클랜 중심의 무장화된 수렵, 목축 사회에서 징발된 [[하이랜더]]를 주축으로 한 켈트식 보병들의 충격력 또한 대단했으나, 잉글랜드군 장궁병들에게 심각할 정도로 취약했다. 특히 잉글랜드군 장궁병대는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좋은''' 무기를 지닌 '''정예''' 궁수들을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인구도 경제력도 잉글랜드가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궁병의 숫자도 많고, 좋은 무기와 훈련을 받아 정예병 육성 또한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동일한 숫자라고 해도 불리한 상황인데 수적으로도 잉글랜드가 우세하니 스코틀랜드 궁수들은 사격전에서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군은 보병대가 잉글랜드 장궁병의 공격을 견디면서 접근만 하면 승산이 있었으나,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고 잉글랜드는 정예 장궁병대 이외에도 강력한 기병대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국토 대부분이 평야인 잉글랜드는 기병 양성이 쉬운 환경이었고 기병을 육성하고 유지할 경제력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이 시대에는 잉글랜드 왕국이 프랑스 내부에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어 잉글랜드는 프랑스에서 육성된 '''중장갑 기사단'''까지 다수 동원할 수 있었다.[* 다만 잉글랜드 왕국의 프랑스 영토는 왕국의 국력을 더해주는 요소이기도 했으나 반대로 왕국의 국력을 소모시키는 요소이기도 했다.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잉글랜드의 프랑스 영토를 두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국 사이에 격렬한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2세의 아버지 에드워드 1세 시대에도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은 프랑스 지역의 잉글랜드 영토를 두고 숱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에드워드 1세의 조부 [[존 왕]] 시절에 프랑스의 잉글랜드 영토 상당수를 잃은 이후 프랑스 왕국은 잉글랜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었으며 잉글랜드는 프랑스 지역에 남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상당한 국력을 쏟아야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스코틀랜드의 3배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던 걸 보면 잉글랜드의 체급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스코틀랜드는 지역 상당수가 산지로 이루어져있어 기병을 양성하기는커녕 사람이 먹을 곡식을 수확할 농경지도 충분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기병을 육성하는 것도 어렵고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렵다보니[* 잉글랜드 왕국과 갈등을 빚고 있던 프랑스 왕국이 간간히 자국 기사단을 스코틀랜드에 파견해주긴 했으나 지리적인 문제로 많은 숫자가 지원되지 못했고 애초에 스코틀랜드는 중무장 기병대를 유지할 경제력도 없었다.] 스코틀랜드 기병대는 중무장보다는 기동성을 강화한 경무장 기병대로 게릴라전이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 대한 약탈 공격에 특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대 스코틀랜드군의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가 게임 [[토탈 워]] 시리즈 중 하나인 [[미디블2: 토탈 워]]의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는 하이랜드 귀족, 귀족 검병대, 귀족 장창병 같은 충격 보병계열은 게임 내 최강급 중 하나로 우월한 국력의 잉글랜드 보병보다 강력하지만 궁병이나 기병들은 제대로 된 게 거의 없다(...). 기병은 공용 유닛인 봉건 기사대가 끝이고, 스코틀랜드 하이랜더 귀족 궁병대는 원거리 사격보다 근접 공격이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지경.][* 다른 게임 [[Europa Universalis IV]]에서도 역사적인 고증으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숙적 잉글랜드에 비해 인구나 세수 차이가 3분의 1에서 5분의 1까지 벌어져있다. 외교적 수단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작부터 스코틀랜드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극한의 하드코어 플레이가 강요된다.] 스코틀랜드의 왕 로버트 더 브루스는 이런 절망적인 전황을 극복하기 위해, 아군에게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여 잉글랜드군의 부대를 나누어 차례차례 격파하고 최종 국면에서는 보병-기병-궁병의 총공세로 잉글랜드군의 숨통을 끊었다. 유기적 협동과 총공세는 말이 쉽지 통신 수단도 제한적인 시대에 사방으로 나누어진 아군 부대들이 올바른 위치에서 정확한 시기에 공격과 방어를 맞추어 수행하도록 조율하는 것은 대단히 난해한 작업이다.[* 서기 533년 트리카마룸 전투에서 반달 왕국군은 로마 제국군에 맞서 부대를 나누어 로마군의 3면을 동시에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다가 부대 사이 상호 연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각 부대가 개별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다가 각개격파당해 참패하고 말았다. 1896년 아드와 전투에서는 열강 이탈리아 왕국군이 에티오피아 제국군을 상대로 비슷한 전술을 벌이려다 거의 똑같은 이유로 참패. 아군부대를 나누어 각기 능동적인 작전을 벌이는 것은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성공하기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로버트 1세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적을 이루어냈다. 휘하 부대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투입하여 스코틀랜드군의 위협인 잉글랜드 장궁병의 견제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한편, 스코틀랜드측의 우위인 보병의 돌격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밀착시켰고, 또 이 과정에서 주력인 보병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열악한 궁병대를 방패로 내세우는 등. 상대와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모든 상황에 맞추어 주도면밀하게 대응한다는 어려운 일을 성공시켰다. 가히 교과서적인 지피지기 백전불태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는 무능에 가까운 졸렬한 지휘를 거듭하였다. 애초에 전장의 환경이 개울과 잡목이 많아 잉글랜드의 최정예 기병대가 제대로 활약할 수 없는 장소였음에도 군대를 진입시켰고, 여기에 아군이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수적 우위만을 믿고 전투를 개시하기까지 했다. 에드워드 2세는 적이 원하는 장소에서, 적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황 아래 싸움에 임했으니 어찌보면 잉글랜드의 패배는 예정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